고향을 그리워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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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가족 그리움 안고'…새해 첫날 서울역 노숙인의 죽음
대만 국적 60대 사망…노숙인 20여명 모여 추모·제사상엔 인스턴트 짜장밥
중국집 주방장하다 실직하고 10여년 노숙…"과묵하고 폐 끼치기 싫어해"
(서울=연합뉴스) 최원정 기자 =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늘 안고 계신 분이었어요. 갑작스러운 이별이지만 형님께서 좋은 곳에 가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빗방울이 간간이 떨어지던 지난 3일 오후 2시께 서울역 서부교차로 인근 노숙인 텐트촌. 별명을 '대로'라고 소개한 노숙인 A씨가 마이크를 잡고 추도사를 읽었다.
새해 첫날인 지난 1일 세상을 떠난 노숙인 고(故) 왕모(60)씨의 추모제가 시민단체 홈리스행동의 주최로 열린 것이다.
서울역 인근 곳곳에 붙은 부고 알림을 본 동료 노숙인 20여명이 모여 왕씨와 얽힌 추억을 이야기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제사상에는 인스턴트 짜장밥과 순대, 곶감, 귤 등이 올려졌다.
숨진 왕씨는 지난 1일 오전 7시 30분께 노숙인 지원시설인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직원이 임시 거처 안에서 발견했다. 경찰과 지원센터는 고혈압 등을 앓고 있던 왕씨가 지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센터 관계자는 "사망 당일 새벽 2시 30분까지도 직원이 텐트촌을 찾아 왕씨의 안부를 확인했다"며 "병원에 가기 싫다는 왕씨를 설득해 인근 병원에서 진료받기로 한 전날에 돌아가셨다"고 안타까워했다.
대만 국적인 왕씨는 30여 년 전 가족과 떨어져 일자리를 구하러 한국에 왔다. 왕씨는 서울 중구 북창동의 중화요리집에서 주방장으로 일했으나 손목 부상으로 실직했다.
이후 그가 어떻게 노숙까지 하게 됐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왕씨와 3년간 함께 노숙했다는 A씨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지만 왕씨가 워낙 과묵한지라 알지 못한다"며 "물어봤자 여기 다른 노숙인들마냥 구차해질 게 뻔하니 따로 캐묻지도 않았다"고 전했다.
지원센터의 상담 기록 등을 살펴보면 왕씨는 최소 2012년부터 서울역에서 노숙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왕씨는 이곳 인근의 지하차도와 역사 안을 떠돌다가 2022년 텐트촌에 자리를 잡았다.
센터는 과음하던 왕씨를 '집중관리 대상'에 포함해 하루에 다섯 번 면담하기도 했다. 센터 측은 2012년 이후 전산망에 기록된 왕씨의 상담 횟수만 600여건에 달한다고 전했다.
왕씨의 임시 거처는 여느 노숙인의 텐트와는 달랐다. 지난해 12월 칼바람에 텐트가 찢어지자 노숙인의 텐트 수리를 돕는 천근성(39) 작가가 버려진 목가구를 손 봐 특별히 만들어줬다.
천 작가는 대만에서 '희(囍)'자가 쓰인 빨간 춘련(春聯)을 사와 왕씨의 거처에 붙여주는가 하면 대만노숙인지원협회와의 접촉도 주선했다. 춘련은 소망을 적어 대문이나 벽에 붙이는 종이다.
천 작가는 "한국에 찾아온 협회 관계자와 30여년 만에 모국어로 이야기하니 그제야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듯했다"며 "새해에는 꼭 대만에 가서 자녀들에게 직접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추도사를 한 A씨는 "왕씨가 매일 성인이 된 딸 사진을 보여주면서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면서 "종교에 귀의해서 이제는 술도 끊고 좋은 일만 생각하자고 다짐하던 분이셨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또 다른 노숙인 임모 씨도 "폐를 끼치기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술 한 잔을 먹더라도 소주병을 어떻게든 현금으로 바꿔오던 친구였다"고 왕씨를 떠올렸다.
경찰은 주한 타이베이 대표부를 통해 부음을 전했지만 유족은 시신 인수를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서울시는 왕씨를 무연고 사망자로 분류하고 공영장례를 치를 방침이다. 왕씨의 유품은 옷가지와 이불 몇 개, 남은 음식이 전부였다. 왕씨가 머물던 '목가구 거처'는 텐트촌에 새롭게 들어오는 또 다른 노숙인의 거처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천 작가는 전했다.
추모제를 마치고 귀가한 천 작가는 소셜미디어(SNS)에 글을 올렸다.
"뭐가 그리 바빠 동이 트기도 전에 분주하게 가셨는지 모르겠지만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기 오신 모든 이웃 마음에 따뜻한 집을 짓고 살아가세요. 저도 종종 그리운 안부를 묻겠습니다."
away777@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