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 다양성에 깊이를 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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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의 눈에서 행사를 했네요. 일주일만 늦었어도, 혹은 빨랐어도 안 될 뻔 했어요. 참 신기하고 기적과 같아요.” 대회를 마치고 많은 사람들이 한 말이다. 엄청난 일을 했지만,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도 모를만큼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대회가 끝나고 누군가 뭘 배웠냐고 물었다. 많은걸 보고 듣고 배웠기 때문에 대답하기 쉽지 않았지만 "진짜를 본 것 같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명료하고 쉬운 답을 좋아한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일이 가장 어려웠다. 해외에서는 한국 상황을 짧고 명확하고 쉽게 전달해주기를, 한국 사람들은 125년의 역사를 가지고 2021년에 33차가 된 이 대회를 쉽게 설명해주기를 원했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에서 지역 코디네이터(local coordinator)를 고용한 이유는 대회를 잘 준비하기 위해 한국의 협동조합들과 해외 협동조합 운동의 연결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개별법, 기본법 협동조합들과 사회적경제 조직들이 모두 공존하는 한국에서 특정 협동조합을 대표하지 않고, 해외 협동조합 운동을 대표하는 국제협동조합연맹과 협업하는 일은 이제와서 돌아보면 재미있었지만,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설명을 한다고 서로의 입장이 이해되는 것이 아니어서 직접 조율할 때도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완충제의 역할을 할 때도 있었다.
대회는 4개의 전체세션과 20개의 동시세션으로 구성됐다. 본대회에 앞서 연구컨퍼런스와 각종 위원회 행사들도 진행됐다. 12월 1일부터 3일간 진행된 본 대회에서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토론이 진행됐다. 대회의 주제는 국제협동조합연맹 125주년과 협동조합 정체성 선언 25주년을 기념하여 ‘협동조합 정체성의 깊이를 더하다’로 협동조합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심화하는 것이었다.
대회를 주최한 ICA는 전세계 112개국 318개 조직이 가입되어 있는 글로벌 협동조합 연합단체이다. ICA는 협동조합 목소리를 대변하고 전 세계 협동조합인들을 모이게 하며, 협동조합 정체성을 지켜내는 조직이다. 이번 대회에는 하이브리드 행사로 온·오프라인을 합하면 97개국 1800여 명이 참석했다. 세부주제를 놓고 각 세션당 적게는 3명, 많게는 8명 이상의 토론자들이 이야기를 나눴다.
본 대회의 테스크포스(TF)와 프로그램팀은 전체세션 뿐만 아니라 각 동시세션의 토론자로 성별, 나이, 분야, 대륙을 모두 골고루 배치하려고 애를 썼다. 직접 섭외하기도 하고, 각 세션의 좌장과 코디네이터들에게 적극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그 결과가 연사 라인업이며, 이게 바로 현재 전 세계 협동조합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행사에서 의도적으로 그리고 거의 의무적으로 성별, 나이, 국가, 분야를 모두 섞어서 토론을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의무가 우리 밖을 벗어나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릴 수 있다.
각 세션의 담당자들이 패널들을 찾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고, 전체 세션의 패널들도 행사 개최 한 달 전에서야 섭외가 완료되었다. 실무자로서는 너무 어렵고 만족스럽지 못한 일의 흐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조합원들의 목소리를 세세하게 들어야 한다는 의무와 그에 대한 압박감이 일의 효율보다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행동들을 만들었다.
우리가 정체성을 정리하고 토론하는 것은 백사장에서 수많은 모래알을 두고 논의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2020년 125주년을 맞이한 국제협동조합연맹은 글로벌 협동조합 운동의 역사의 산물이다. 그동안 협동조합은 세계 각 지역에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왔다. 협동조합에 들어오는 문턱이 낮아져 참여자는 더욱 다양해졌다. ‘협동조합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하나의 답을 찾지 않아도 된다. 단 하나의 단순하고 명쾌한 답이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다양한 시각들이, 그리고 다양한 목소리들이 공존하는 곳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다양성은 수많은 협동조합인들이 노력해서 얻은 결과이다. 청년의 목소리가 필요할 때 갑자기 찾으면 어렵다. 협동조합에서 활동하는 청년이 있을 때, 그 청년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가능하다. 다양한 분야와 국가의 협동조합인들의 이야기가 필요할 때, ICA 회원들을 통하면 찾을 수 있다. 다양성의 넓이도 중요하지만 깊이도 중요하다는 것은 이번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과 그들의 토론을 들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번 대회로 글로벌 협동조합 운동의 인식이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만만한 곳이라고 생각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회원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ICA 같은 국제조직은 소수의 목소리가 글로벌 운동을 대표할 수 없도록 지역의 협동조합들이 주체적으로 역할을 해나가야 한다. 특히 연합회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협동조합의 다양성은 구색을 갖추는 것을 넘어서 깊이로 채워질 것이다.
[출처] 이로운넷